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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3탄.
피고인 박열, 후미꼬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1926년 3월 25일-
판사의 이유 모를 방청객 퇴출과 일본의 재판 방해 등 지금도 재판 기록을 완전히 공개하지 않을 만큼 의혹이 가득했던 재판의 결과는 결국, 사형이었다.
하지만 끝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조선의 청년 박열은 재판장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한다.
재판장 수고 많았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한다만 내 정신이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일본의 재판 결과에 어떤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던 그였지만, 그런 그도 도저히 견딜 수 없던 것은 바로 후미꼬와의 이별이었다.
그렇게 둘은 혼인을 올린 지 며칠 만에, 서로 다른 교도로로 수감돼 다시는 만나지 못할 이별을 한 채 죽음만을 기다리게 된다.
하지만 의혹이 가득했던 재판에 대한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일본은 이례적으로 사형 선고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는 조치를 내린다.
그렇게 그들이 수감된 지 3개월이 흘렀을 때였다.
오랜만에 박열에게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후미꼬 측에서 보낸 편지였다. 설레는 마음을 감출 틈도 없이 그 편지를 열어보았다.
후미꼬 사망. 박열에게 전해진 그녀의 자살 소식이었다.
그녀의 나이는 불과 23세.
그렇게 평생 한 번뿐이던 사랑을 잃어 버려야 했던 청년, 박열.
그렇게 그가 죽음보다도 힘은 고통의 시간을 견디며 감옥에서 보낸 시간은 무려 22년2개월이다.
독립운동가로선 최장 징역 기록이다.
광복이 돼서야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청년, 아니 이젠 45세의 중년이 되어버렸다.
독립운동 때문에 사랑을 잃고, 인생의 셀 수 없는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던 박열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을 만도 한데 멈추지 않았다.
김구를 도와 일본에 묻혔던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우해를 걷어 한국으로 송환하였다.
광복 후 혼란스럼기만 했던 나가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하지만 6.25전쟁시 납북되어 그렇게 그는 우리들의 기억에서 지워졌다.
단지 그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일원으로 평화통일을 위한 운동을 전개했었고 1974년 7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만 전해졌다.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리고자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사랑의 주인공이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내바쳤던 독립운동가 박열은 조국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영원한 청년이다.
지금 우리는 그의 외침을 기억하고 있을까?
저들은 내가 불령하다고 죽음으로 협박하고 있다.
그러나 정말 세상에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임이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떨쳐버리는 용감한 혼을 가져야 한다.
나는 용감한 혼을 가졌다.
세상에 어떠한 것이 정말 무서운 것인가? 그것을 나는 놈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내 몸은 단두대에 한 방울의 이슬로 사라지게 할 수는 있으나,
내가 뿌린 씨앗은 후세에 남아 딱딱한 지각을 깨고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그리고 종국에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내가 일본제국에 준 상처는 영원히 일본의 몸에 남아 심장을 썩게 해서 마침내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나는 승리자다.
영원한 승리자다. -박열-